VoIP(Voice over IP)라고 했다.
인터넷을 통해 음성을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기술이 출현했고, 이 혁신적인 기술을 이용하면 인터넷선을 통해 인터넷 뿐 아니라 전화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신기술이었고, 트랜드였다. 동종업계의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도 진입장벽이 있는 남다른 기술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으며, 업계에서도 향후 먹고 살기 위한 새로운 꺼리로써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이른 바 "Emerging Technology"이었다. 이 있어 보이는 기술을 나는 운이 좋게도(?) 2000년도 신입사원 시절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할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던 반면, 찾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는 통에 경제학의 수요/공급 법칙에 따라 신기술의 가치는 올라갔고, 그만큼 내 어깨에도 점점 힘이 실렸다. 누구도 하지 않는 최첨단 기술 노하우를 보유한 핵심 엔지니어!!, 그게 나였다. 이 복잡하고 어려운 프로토콜의 알고리즘과 동작을 그 누가 이해할 것이며, 아무 문제없이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축해줄 것인가?
어느 VoIP 세미나가 있는 날, 많은 대중들에게 최첨단 기술을 이해하기 쉽게 보여줄 요량으로 VoIP 게이트웨이를 2대 구성하고 아날로그 전화기를 게이트웨이의 FXS포트에 연결하여 간단히 전화시범을 보였다. 와이프가 지나가는 길에 들렀길래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전화통화 시범을 보여주며 자신있게 말했다. " 이게 VoIP이라는 거야!! 내가 하는 최첨단 기술이지. " 와이프는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한마디 던졌다. " 전화 원래 되는거잖아, 이게 왜 최첨단 기술이야?"
VoIP가 크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유는 전화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0년 새롬 다이얼패드는 PC 인터넷을 통해 국내 및 국제전화를 공짜로 제공해주면서 전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전화사업자들은 해외 중소규모의 전화 도매사업자들과 VoIP로 콜을 주고 받으면서 저렴한 콜링카드 서비스를 제공하여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전화사업자에게 회선을 빌리고 통화할 때마다 번번히 통화료를 상납해야 했던 기업들은 VoIP를 이용하면 자신들이 돈들여 구축해놓은 사설망(물론 회선은 사업자에게 빌려야 하지만...)을 통해 데이터 통신뿐만 아니라 회사 내부의 전화 통화를 비용없이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매력적인 효과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VoIP는 기대만큼 확산되지 못했다. 결정적인 원인은 품질과 안정성이 기존 전화에 비해 떨어진다는 사실이었고, 두번째는 통화 절감 이외의 가치가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롬 다이얼패드을 위시한 비스므리한 ASP들은 수익성과 통화품질 저하라는 이중의 부담을 등에 업고 한순간에 무너졌고, 기업들은 전화관리 업무를 밥줄로 생각하는 각 기업 총무부서의 완고한 입장과 믿을 수 없는 VoIP 서비스 품질때문에 최첨단 기술 도입을 외면했다.
이 정도면 꼬리를 내릴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서비스 제공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살을 붙여 돈 더 드는 솔루션을 탄생시켰다. "IP텔레포니"라는 이름으로 이전의 단순한 전화/데이터 통합 전송 뿐만이 아니라, 전화교환기와 큼직막한 화면이 달린 IP전화기 그리고 가지가지 부가서비스를 갖다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들이 말하는 VoIP의 가치는 값싼 요금이 아니었다. 기존의 전화 서비스 개념을 뛰어 넘어 다양한 부가서비스와 정보를 제공해줌으로써 개인의 업무생산성과 사용편이성을 한차원 높이는 혁신적 가치를 보여주겠다는 언뜻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치를 내걸기 시작했다. 서비스 제공자들은 이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뒤이어 새로운 개념을 구체화해 나갔다. UC(Unified Communication)라는 이름으로 음성, 영상, 채팅, 문서공유 등 멀티미디어 인터페이스의 통합 협업을 트랜드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언제 어디서든지 동일한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선전화와 무선전화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FMC(Fixed Mobile Convergence) 서비스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 통합 혹은 융합(Covergence) 개념의 출현은 통신 서비스의 기본적인 구조를 뿌리 채로 흔드는 형태로 진화해 나가고 있으며, 또 한차례 사람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몇년 전 세미나에서 내 말문을 막히게 했던 와이프의 한마디를 떠올리면서 이런 가정을 해본다. 만약 VoIP가 없었으면 전화 서비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KT는 전화사업으로 건재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동전화와 별정통신으로 인해 점차 매출은 줄어들겠지만, 지금처럼 인터넷전화 번호이동 때문에, LG데이콤, 삼성네트웍스의 인터넷전화 서비스에 전전긍긍하고 고민하지 않을테니까..., 그러면 전화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은? 무슨 변화가 있을까? 불편할까? 심심할까? '왜 전화는 발전이 없어'하며 불만을 터트릴까?
아마도 별다른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서비스 제공자들이 그저 돈을 더 벌기 위해 일을 벌리지 않은 것 뿐이고, 사람들은 '이런게 있었네'라고 혹하며 반응하지 않았을 터이니까... 소비자들은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고, 수동적이어서 공급자가 주는 대로 받아먹기 마련이다.
어찌됐든, 새로운 도전과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주목은 계속 되고 있고, 그것를 위한 기술의 발전 또한 점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랜 기간에 걸친 끝에 VoIP는 현재 인터넷전화, UC, FMC 등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지만, 그래서 이 기술과 사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부딪히고, 애를 쓰고 있지만, 정말 뜻하는 만큼 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 이거야!'하고 무릎 탁칠 수 있는 희열과 성취감을 VoIP를 통해서 느껴본 사람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즉, 대박이 없었다는 얘기다.
사람들이 지금 인터넷전화를 선택하는 결정적 이유는 서비스 제공자들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값싼, 혹은 공짜 요금이다. 전화 서비스에 대해 사용자들은 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싼 서비스로만 여길 뿐 선도자들이 강조하다 못해 강요하고 있는 다른 가치는 그리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서비스 제공자들은 고민에 빠져 있다. 인터넷전화의 출현으로 전화 사업자간 경쟁은 더욱 심해졌지만 전화 시장에서 나눠 먹을 수 있는 파이도 또한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전화, VoIP를 포함한 전화 서비스는 포화될때로 포화되어 이른 바 레드오션이 되어 버린 듯 싶다. 기업들은 비싼 돈 들여 UC나 FMC를 도입해서 대단한 성과를 얻었을까? 아직 실험적 단계인 이 기대주들은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기술적인 완성도나 경험치, 안정성 측면에서 기쁨보다는 실망을 줄 가능성이 많다. 각 기업의 IT담당자들은 기대치에 비해 성과없는 UC, FMC라는 포장으로 자신들의 밥줄을 이어나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럼 이대로 끝인가? 글쎄,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미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와 버렸고, 그만큼 예상 불가능한 가능성의 길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성공한 사례가 없을 뿐이다.
분명한 건 지금의 방식을 고수해서는 사용자의 마음을 잡아두기 힘들어보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뛰어넘을 다른 차원, 다른 개념의 서비스를 만들어야 하며, 그것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수익을 창출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어떤 접근이 필요할까?
첫번째, 전화는 공짜가 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전화 서비스에서 전화가 무료가 되면 어떡하나? 하지만 실제 가능성은 존재한다. 예전처럼 전화는 독점적 사업자만의 권위적 서비스가 아니다. 내가 원하면 미국에 있는 친구와 얼마든지 공짜로 대화할 수가 있다. 그게 MSN이나 스카이프를 통한 음성/화상 채팅일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너무 쉬운 VoIP 프로토콜로 뚝딱뚝딱 만들어서 개인전용 전화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과 15~2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신 제3의 서비스를 전화 기반에서 올려놓아야 한다. 그게 도매사업이든 소매사업이든, 결합상품이든 신개념 서비스이든 상관없다. 물론 사용자가 한순간 혹할 수 있는 매력적인 서비스여야 하고, 사람들의 생활 패턴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개념적 접근이 선행되어야 한다.
두번째, 국경을 뛰어 넘어야 한다. 지금껏 전화는 국가 단위의 서비스였다. 앞서 얘기했듯이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운 전화서비스가 가능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융합개념으로 서비스 경계도 사라지고 있지만, 국가간 경계도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진정 무한 경쟁시대가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국가별 Regulation이 천지 차이이기 때문에 걸림돌이 여전하지만, BT, 버라이즌 등 글로벌 통신사업자들은 이미 틈새를 노리고 있다. FMC는 국가 내 서비스는 큰 의미가 없다. 사용자는 비용 절감을 위해 FMC를 사용하려고 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사업자는 Carnivalization으로 수익창출은 커녕 오히려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국제전화 요금의 틈새를 FMC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세번째, 인터넷망과 이동통신망이 개방되어야 한다. 이는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업자들의 입장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당장 없지만, 개방된 망에서 전화와 다양한 부가서비스를 누구나 제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면, 이 장에서 누구나 쉽게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새로운 시장 창출을 촉발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망 사업자들은 가능성 많은 사람들에게 놀이터를 제공해줌으로써 수익을 만드는 모델도 만들 수 있다. 실제로 BT는 이러한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
자, 이제는 한번쯤 터질 때도 되지 않은가?
누가 해도 좋으니까, 한번 해봐라. '아, 그래 내가 선택 잘했어'라고 생각할 수 있게..
그 희열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 다 같이 도전해보자..
헛소리 그만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 남은 업무나 봐야겠다.